이야기를 옮긴다는 것
영어로 옮기기 시작하자마자, 생각보다 빨리 멈춰 서게 되었다.
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, 그 안에 들어 있는 놀이 하나 때문이었다.
가장 먼저 걸린 지점, 아까시아 잎 점
‘아까시아 잎 점’은 이야기 안에서 아주 짧게 등장한다. 하지만 이 짧은 장면은, 이 동화가 어떤 결을 가진 이야기인지 보여주는 핵심이기도 했다.
아이들이 잎을 하나씩 떼며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지고, 마지막에 남은 잎에 조용히 의미를 건네는 그 놀이. 한국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각이지만, 영어로 옮기는 순간 그 전제가 사라졌다.
leaf fortune-telling. leaf game. wish game.
어느 표현도 틀리지는 않았지만, 맞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. 단어는 옮겨졌는데, 장면의 온도는 남지 않았다.
이 놀이를 설명하려고 만든 이미지들이 오히려, 내가 이 장면을 왜 쉽게 옮기지 못했는지를 더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.
AI 번역을 쓰되,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던 이유
여기서부터 이 작업은 번역이 아니게 되었다.
이번에는 번역 과정에서 AI도 함께 썼다. 다만 ‘맡긴다’는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. 초안을 빠르게 얻기 위해 AI를 사용했지만, 최종 판단은 늘 사람의 몫으로 남았다.
내가 택한 방식은 단순했다. 영문 초안을 만든 뒤, 다시 한국어로 되돌려 읽었다. 한 문장씩, 하나하나. 뜻이 맞는지보다 호흡이 살아 있는지, 장면이 원래의 감정을 유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.
어느 순간부터는 번역기가 아니라, 내 감각이 검수의 기준이 되었다. 언어를 옮기는 속도보다, 이야기의 온도를 잃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.
영문 초안을 빠르게 얻고, 판단과 수정에 시간을 쓰는 방식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현실적이었다.
여기서부터 이 작업은 문장을 영어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, 이 장면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상상하는 일에 가까워졌다.
이 놀이가 설명되어야 하는 순간, 이야기는 갑자기 교재처럼 변할 위험이 있었다.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고, 설명하면 동화의 리듬이 깨졌다.
그래서 한동안 그 장면을 그대로 두고, 앞뒤 문장부터 다시 읽었다. 이 장면이 왜 필요한지, 이 놀이가 어떤 감정을 남기길 바랐는지를 먼저 생각했다.
타깃을 다시 정한다는 것
이 선택에는 영어권 그림책 시장의 독서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. 영어권에서는 문장의 복잡함보다 리듬과 반복, 장면의 즉각성이 읽기의 핵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.
번역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‘누가 이 책을 읽는가’가 다시 떠올랐다. 한국에서 이 이야기는 8–11세를 중심으로 출간했다. 하지만 영어판에서는 5–8세로 타깃을 옮기기로 했다.
이건 이야기를 더 ‘어리게’ 만들려는 선택이 아니었다. 오히려 영어권에서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,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장면들이 문장의 난이도보다 리듬과 명료함에 의해 더 잘 전달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.
영문 독자에게 ‘아까시아 잎 점’은 이미 아는 놀이가 아니다. 낯선 문화를 소개하는 순간, 문장이 길어질수록 감정은 쉽게 흩어진다. 그래서 더 짧게, 더 또렷하게, 그리고 더 따뜻하게.
타깃을 낮추는 일은 결국 문장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, 독자의 첫 장면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뜻이었다.
옮기지 않은 것들
결국 몇몇 요소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. 굳이 영어식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는 감각들, 설명하지 않아도 흐름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.
이 동화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. 조금은 낯설고, 조금은 여백이 남아 있어도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.
번역을 멈췄던 과거의 나는, 이 장면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. 지금의 나는,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쪽에 조금 더 기대를 걸고 있다.
그래서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. 속도를 늦췄을 뿐이다.
고등학생 시절에 적어두었던 짧은 글 하나가 애니메이션을 거쳐, 한국의 전자 동화책이 되었고, 지금은 영문 동화책으로 출간을 앞두고 있다. 이 연재는 그 사이의 과정을 남기는 기록이다.
이 이야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다면, 아래에 남겨둔 기록들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. 이 영문 동화 출간 여정은, 그 시간들 위에서 이어지고 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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